언론기사
농업경제학자가 행복경제학을 찾아간 까닭은 | |||
작성자 | 김명석 | 작성일 | 2022. 12. 05 |
---|---|---|---|
조회수 | 527 | ||
링크 | http://www.ikp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49246 | ||
박진도 충남대 명예교수, 지역재단 상임고문 지난 2년간 <가보세>에 매월 초 원고지 30매 분량의 글을 기고해왔다. 내 글에 관심을 보인 독자들 가운데 적지 않은 사람이 두 가지 질문을 했다. 상과대학 경제학과를 나온 것으로 아는데 왜 굳이 농업경제학을 전공했느냐. 농업경제학을 하면서 왜 행복경제학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느냐. 필자는 한국전쟁 중에 강원도의 반농·반어촌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 무렵의 거의 모든 농촌이 그랬듯이 내가 살던 마을도 참으로 가난했다. 하루 세 끼를 먹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고, 어부들은 목숨을 걸고 고기잡이에 나갔다. 어린 나는 우리 동네 사람들이 잘 살았으면 하는 바람을 갖게 됐다. 철이 들면서 우리 동네만 못사는 게 아니라 나라 전체가 가난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내가 대학에서 경제학과를 선택한 이유다. 대학입시 면접에서 “경제학을 공부해 우리나라를 가난에서 벗어나게 하고 싶다”고 말해 면접관 교수들의 웃음을 자아냈다. 왜 농업경제학인가 왜 하필 농업경제학이냐. 내가 대학을 입학하던 1970년에 우리나라는 가난한 농업 국가였다. 1인당 국내총생산은 254달러(2020년 현재 3만1,727달러), 전체인구 가운데 농가인구 46%(2020년 4.3%), 전체 취업자 가운데 농림어업취업자가 50.4%(2020년 4.5%)였다. 우리나라가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농업이 발전해야 하고 농민이 잘 살아야 했다. 경제학도가 농업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나는 대학 2학년 때 학내 잡지(상대평론)에 일제 강점기의 소작문제에 관한 작은 논문을 발표한 이래 대학원에서 줄곧 농업경제 연구에 매진했다. 사실 그 무렵 많은 경제학도들이 농업경제를 공부했지만 우리나라 경제가 산업화하면서 농민들이 이농했듯이 경제학자들도 이농하여 전공을 바꿔갔다. 유학 등 몇 차례 전공을 바꿀 기회가 있었지만, 못난 소나무가 고향을 지킨다는 말이 있듯이 다른 분야에는 한눈팔지 않고 전업농 경제학을 고집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농업경제학자가 아니었다. 농업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니 말이다. 농사를 지어본 적이 없고, 학생들과 농활을 하고, 텃밭을 조금 일궈본 것 외에는 농사경험도 없다. 내 강의를 듣는 모든 학생에게 명강의(?)를 듣는 조건으로 매 학기 2박 3일 혹은 3박 4일의 농활을 강하게 권장했다. 초기에는 경제학과에서 웬 농활이냐는 반발도 없지 않았다. 나는 길게 농활의 의의를 설명하고, “너도 나도 밥 먹고 산다”는 말로 마무리했다. 덕분에 나도 다양한 농사 체험을 할 수 있었다. 농업보다는 농민이 나의 주된 관심이었다. 대학원 석·박사 논문은 모두 ‘농민층분해’에 관한 것이었다. 전통사회에서 동질적이었던 농민들이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포섭되면서 어떻게 서로 다른 계층으로 나눠지는가를 연구했다. 나는 초기에는 정통 마르크스 경제학의 영향을 받아 농민층 내부의 계급적 분해(지주와 소작농, 부농과 빈농)를 연구했다. 그러나 국가와 자본에 의한 농업지배, 농업기계화(시설화·현대화) 등이 진전되면서 농민층 내부의 고용-피고용(착취-피착취)이라는 기본모순보다는 농업 외부의 자본과 국가에 의한 농민수탈이 주된 모순으로 전화한 것을 알게 됐다. 그때부터 국가의 농업정책을 주로 연구했다. 연구와 실천, 지역재단의 창립 농업경제를 연구하면서 관심 영역을 농촌경제와 지역경제로 넓혀갔다. 농업은 농민이 경제적 삶을 영위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토대이지만, 농민이 잘 살기 위해서는 농업뿐 아니라 농민들의 삶의 공간인 농촌이 발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농촌이 경제, 사회문화, 환경을 아우르는 삶의 공간으로 발전해야 한다. 농업은 농촌경제의 기간산업으로 가장 중요하지만, 농업만으로는 농촌경제가 유지될 수 없다. 농업을 기반으로 한 다양한 일자리가 창출돼야 한다. 농촌은 고립된 공간이 아니다. 도시와 깊은 연관 속에서 존립한다. 농촌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도시와 상생해야 한다. 연구 영역을 무한정 확대할 수 없기 때문에, 농촌과 직접적 혹은 밀접한 관계 하에 있는 시·군 범위의 지역문제를 주로 고민했다. 나는 연구만 한 것이 아니라,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함께 실천하기 위해 노력했다. 대학 은사이신 서울대 정영일 교수님을 모시고 1993년 농정연구포럼을 만들고 이것을 2001년 농정연구센터로 확대해 6년간 초대 소장을 맡았다. 농정연구센터는 주로 농업, 농촌, 식품 관련 분야의 정책을 연구하는 일종의 싱크탱크였다. 우리는 좋은 정책을 많이 제안했지만 받아들여지는 것은 거의 없었다. 그 이유는 지엽말단적인 개선이 아니라 농정의 근본적인 전환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기득권(정치권과 관료 심지어 학계)이 변화를 거부했고, 우리는 그것을 이겨낼 힘이 없었다. 목마른 사람이 샘을 판다고 하듯이 농촌 현장이 스스로 기존의 질서를 극복할 힘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지역리더의 중요성을 새삼 깨달았다. 내가 말한 지역리더란 ‘지역의 문제를 스스로 고민하고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혹은 조직)’을 말한다. 이러한 지역리더가 학습하고 연대하고 실천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하기 위해, 2004년 ‘지역을 바꾸어 세상을 바꾼다’는 거창하고 겁 없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지역재단을 창립했다. |
남을 비방하는 말, 비속어, 음란성 글, 광고성, 실명을 사용하지 않은 글은 관리자 임의로 바로 삭제합니다.